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빈 롬멜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ommelinFrance.jpg|width=100%]]}}} || || {{{#000 프랑스 침공 초기의 롬멜과 독일 육군 제7기갑사단}}}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롬멜은 [[기동전]]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기계화부대의 운용에 대해 연구했고, 이는 훗날의 활약의 밑거름이 된다. 사실 [[폴란드 침공]] 초기 때까지만 해도 롬멜은 승전의 가장 큰 기여자는 기갑, 기계화 부대가 아닌 항공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호위하면서 본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 운용에 감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롬멜은 기갑 부대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에 독일 기갑군은 제공권을 빼앗겨 장기이던 신속한 운영을 하지 못하고 제 때 방어하는 데에 실패한다.]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은 제7기갑사단장으로 복무했다. 침공이 시작되자 롬멜은 전격적으로 프랑스로 진격해 구데리안보다 더 빨리 [[뫼즈 강]]을 도하했다. 이때 롬멜의 부대는 제2호, 3호 전차의 최대 속도를 가정한 이동 범위보다 더 멀리 이동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기동력을 보여 프랑스군에게 ‘유령 사단(Ghost Division)’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런 성과의 비결은 제7기갑사단 소속 로텐부르크 기갑[[연대장]]의 서신과 당시 제7기갑사단 기갑수색중대장 직책으로 근무했던 [[한스 폰 루크]]의 저서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의 서술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죽도록 갈궜다'[* 말 그대로 휘하 연대장과 중대장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미친 수준의 기동을 강요했다.] 또는 '회오리바람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연대본대보다 롬멜이 직접 이끄는 서너대의 전차가 전선에 돌진하여 돌파하거나 재정비한다고 쉬는 부대가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공격을 명했다.]정도로 요약된다. 몇몇 학자들은 이 경이로운 기동력에 [[각성제]] 등 항정신 약품 사용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실제 문서상에는 그러한 품목의 보급 기록이 없다. 물론 당시에는 각성제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대표적인 예로 구데리안은 휘하 부대에게 각성제를 적극적으로 공급하였고 이에 힘입어 쉬지 않고 스당을 돌파했다.] 워낙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줘서 그렇게 의심해 볼만하기는 하다. 롬멜은 여기서 막나가는 지휘 패턴을 보여주었는데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도하작전, 수송대 편성 등을 직접 하며 최전선에서 동분서주하고, 결국 한 개 보병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 포탄이 사방에 작렬하는 가운데 7기갑의 분견부대는 결국 강을 건넜다. 사실 그때 직속상관 [[헤르만 호트]] 장군과 동료 하르클리프 장군과 마찰을 빚는데, 2개 사단이 한 번에 도하하지 못할 거면 하르클리프에게 갈 물자와 도하 장비를 모조리 제7기갑사단에게 제공하기를 했다. 이 오만하고 이기적인 요구에 호트는 크게 당황하고 하르클리프는 격분하지만 인자한 영감 호트 장군은 롬멜의 과격한 요구를 들어주고 하르클리프 장군을 달랬다. 뫼즈 강을 건넌 롬멜은 옹에라는 마을로 서진을 시작했는데, 진두지휘를 위해 휘하 [[연대(군대)|연대]]장의 지휘전차인 3호 지휘전차를 빼앗아 타고 가고 있다가 [[대전차포]] 매복에 걸려 피격되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옹에를 손에 넣는다. 제7기갑사단은 드디어 벨기에 국경의 연장 마지노선에 도착하는데 집단군사령부는 이 요새선에 대한 '공격 대기'를 할 것을 명령했지만, 롬멜은 사령부에 자기 참모만 남기고 전차연대를 이끌고 나가버렸다. 결국 '제한 조건'을 달고 있던 서식이 도착했을 때 롬멜은 이미 닥돌을 시작한 뒤였다. 이렇게 진격한 끝에 드디어 아헨에 도착했는데, 그 후 프랑스 육군 전차부대와 조우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여세를 몰아 서쪽의 랑드르시로 돌격, 그냥 가서 롬멜이 “항복하라!”고 하자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육군은 독일 육군을 대군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항복했다. 드디어 제7기갑사단은 유류와 탄약 고갈로 랑드르시에서 정지했고 이미 50km 가까이 진군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롬멜 자신이 직접 지휘한 기갑연대만 돌진했고, 군단장 명령에 인해 남은 병력은 아직 요새를 넘지 않았다. 결국 롬멜은 사령부로 돌아가기로 결심,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시작한다. 롬멜은 자기 지휘차와 3호 전차 한 대를 호위용으로 붙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3호 전차가 퍼져버렸고 결국 롬멜의 지휘차만 다시 후방 50km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후방에는 우회당해 교전도 못 해본 온전한 프랑스 육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롬멜은 요새지대를 피해가며, 뭔가 많아보이는 행군 중인 적에게 지휘장갑차 혼자 다가가서 당당하게 적 지휘관에게 “항복하라!”고 외쳤으며 프랑스 육군들은 전부 낚여서 항복했고 이렇게 몇 차례 성공했다. [* 이런 사기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 육군은 통신도 개판이었고 상황 전파도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 육군의 장군이 [[갑툭튀]]해서 “항복하라!” 하니까 상식적으로 적 장군이나 되는 자가 아무 대책없이 왔을 리가 없으므로 '''“어, 우리 포위된 건가?”'''라 생각하고 항복해버린 것.] 드디어 롬멜은 아헨에 도착했는데, 사단 참모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이제야 아헨에 도착한 상태였다. 롬멜의 장갑차 뒤에는 프랑스 육군 트럭 40대 안에 포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롬멜은 이 공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맹진격을 거듭하던 도중인 5월 21일,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아라스에서 역습에 나선 영국 육군의 전차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때 [[마틸다 II|상대편 전차]]의 방어력이 뛰어나 50대 이상의 전차가 순식간에 파괴당하자, 사단장인 자신이 직접 [[루프트바페]] 소속 [[방공포병]] 부대의 [[8,8cm FlaK]]을 대여해서 적 전차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대구경 대공포의 화력을 응용한 이 작전은 유효해서, 이후 독일군은 대전 내내 88mm 대공포를 대전차용으로도 사용하게 된다. 물론 완전한 임기응변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이 88mm 대공포는 개발 당시부터 대전차용으로 쓸 수 있도록 철갑탄이 개발된 상태였다. 단, 소련에서 [[KV-1]]을 만날 때까지는 고폭탄으로도 충분히 전차를 격파할 수 있으므로 철갑탄의 숫자는 매우 부족했다고 하며, 역시 화포 자체의 수량 부족 및 대부분의 대공포가 공군 소관이라 소속도 달라서 사실상 이때 용도 전환하기 전에는 해당 대공포를 운용하는 대공포병도 지상목표를 잘 사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물꼬를 튼 셈이다. [[프랑스 침공]]에서 극적인 활약으로 일약 독일 육군 최고의 저명인사로 떠오른 롬멜은 그를 주연으로 하는 전시 선전영화 "서부의 승리"가 그를 위해 특별 상영되는 등, 인생 최고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영광이, 이후 그의 전설을 만들게 되는 또다른 무대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